미즈노 남보쿠는 오사카의 아와자[阿波座] 출신으로 일본 왕실이 인정한 당대 최고의 관상가였다. 어릴 적 부모가 세상을 떠나 갑자기 고아가 된 그는 삼촌 집에서 살면서 지독한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10세 때부터 돈이 손에 들어오면 바로 술을 사서 마셨고 툭하면 싸움질이었다. 18세 때는 술값 때문에 옥살이를 했다. 그 옥살이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생겼다. 그는 죄수와 일반 사람들의 얼굴 형태가 다르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관상에 대한 흥미는 이렇게 감옥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남보쿠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름 있는 관상가들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목숨에 위협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누군가 남보쿠에게 칼을 맞아 죽을 얼굴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내린 것이다. 앞으로 1년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았다. 그는 남보쿠에게 그 운명을 피하는 방법으로 스님이 되기를 권했다.
스님이 되어야 산다? 아니다!
남보쿠는 당장 근처에 있는 절로 찾아가 출가하고 싶다고 졸랐다. 주지 스님은 수행의 길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며 한사코 받아들이길 꺼리며 과제를 내줬다. 주지 스님이 정한 기간 동안 보리와 콩만 먹고 사는 고통을 이겨내면 수행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남보쿠는 그저 살고자 하는 일념으로 버텼다. 마침내 약속한 기간이 지난 어느 날, 기쁜 마음으로 주지 스님에게 달려가는 길에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예전에 남보쿠에게 죽음을 예고했던 관상가였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묘했다. 어리둥절해하면서 칼로 죽을 검난(劍難)의 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관상가는 “그동안 큰 공덕을 쌓은 것 같다”라고 변화의 이유를 해석했다. 사람의 생명을 구했거나 도를 닦았거나 하는 큰 변수가 없었다면 죽을 운명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되짚어보면 남보쿠에게 공덕을 쌓은 기억은 없었다. 단지 보리와 콩만 꾸준히 먹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동안의 일을 솔직히 이야기하자 관상가는 무릎을 쳤다. 1년 동안 무엇을 먹었느냐가 아니고 오랜 기간 식욕을 절제한 게 큰 음덕이었다고 분석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새 인생을 살게 된 남보쿠는 출가를 하려는 결심을 접었다. 감옥에서부터 키워온 관상에 대한 관심이 다시 머릿속에 가득 찼다.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살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불탔던 것이다.
그는 스님이 아닌 관상가로서 험난한 고행을 시작했다. 목욕탕은 물론 화장장에서까지 사람들의 전신 상(相)이나 얼굴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치열한 연구의 결과, 당대 최고의 관상가로서 자리매김한 남보쿠는 일본 왕실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다.
관상학의 대가였던 남보쿠의 관상은 어땠을까?
본인의 기록에 따르면 ‘키가 작고 얼굴 모양은 답답하고 비좁아 대범치 못하며 입은 작고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인당(印堂 : 관상술에서 양쪽 눈썹 사이를 이르는 말)은 좁고 눈썹은 엷다’라고 한다. 눈과 눈썹 사이도 좁고 코는 낮으며 광대뼈는 불거지고 이는 짧고 가늘며 발도 작다는 평이다. 종합하면 보기 드문 빈상(貧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자신의 관상을 극복한 것은 식습관이었다.
그는 사람의 운명이 음식에 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에 따라 매일 주식은 보리 한 홉 반과 술 한 홉으로 했다. 쌀로 된 것은 떡이라도 먹지 않았으며 부식은 한 가지 채소로 만든 한 가지 즙만 먹는 등 음식을 절제했다.
남보쿠의 관상법은 혈색기색류년법(血色氣色流年法)이라고 하는 독특한 종류이다. 기존의 숙명론적 관상법과는 달리 그는 노력하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저서로는 《남북 상법》 1〜10권, 《상법화해》 1・2권, 《상법수신록》(‘남북상법수신록’, ‘남북상법극의수신록’ 등으로도 불림) 1〜4권, 《비전화》, 《개귀현론》, 《신상전편정이해》, 《연산상법》, 《상법대역변론》 등이 있다.